behind the door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 것인가
삶을 선택의 연속이라고 보는 경우에 적지 않은 모습일 것입니다. 이를 확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언급해보려는 부분도 적지 않게 소개되고 있는 내용으로 의문과 함께 다루어봅니다. 물론 모든 경우에 이런 의문을 지님은 낭비와 비효율이 되기에 적절한 경우에 그런 의문을 해보는 것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주입식이 효과적인 경우와 때로는 부적절이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예로, 어느 곳에서 이동 방법에 대한 의문은 부적절할 것입니다. 길을 내어 운송 도구가 있는데 과연 자신이 그것이 합당한 것인가 의문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임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런 곳에 집중은 가치가 낮을 것 같습니다.
이미 검증된 사용하기에 적합한 물건도 이것이 왜 필요한가 하면서 다른 것을 제작해 내려는 접근도 그와 같으며, 학문의 여러 존재도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진정 더 나은 무언가를 생산해 내려는 데는 합당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추측과 이론 등에 근거한 어느 지식에는 지속되는 관심으로 시절이 변하며 옳거나 더 정확한 내용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의문도 알맞은 것에 두어야 함은 또한 지식이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기에 지식은 지혜와 함께 적지 않게 중요함의 이유입니다.
인생은 성장하면서 나름의 판단의 기준을 정립해 나갑니다. 그것이 없다면 삶은 매우 불완전하며 혼돈 가운데 항시 불안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지식과 지혜 등 여러 존재하는 업적을 토대로 합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관계 가운데 얻어지는 것입니다. 좋고 좋지 않음을 체험하며 각자의 성장 가운데 두뇌와 마음과 신체와 나아가 영혼이 더해지면서 개인의 성격과 성향이 자리를 잡으며 이는 한 사람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편견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의견 견해에 있어서 너무 일방적으로 균형을 잃고 무언가를 한쪽으로만 바라보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흑백 논리라고 얘기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 강요 받는 사회의 단면이며, 개인도 그러할 수는 있어도 이는 좋은 모습이라고 평가 받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융통성이 너무 없다 외골수다 등 모두 같은 선상일 것입니다. 물론 어느 분야에는 그런 편견이 나름 허용되며 존재 가치가 있을 수 있음에도 그와 같음을 넘어 대개의 일반적인 경우에 관해 편견은 좋지 않음의 대명사입니다.
편견은 향후 조절될 필요가 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무언가 일방을 너무 추구하거나 좋아하면 이도 같은 선상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편견이 존재 가능한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그런 모습이 좋지 않을 수 있음으로 이를 제자리를 잡아 가는 모습의 접근은 유효하며 필요합니다. 편견을 고집하겠다는 사람을 무어라 할 수는 없음에도 삶 가운데 점검하는 계기가 있기를 바래봅니다.
예로 평시에 사용하는 칼에 관해 이를 생명을 해하는 나쁜 용도로서만 생각하여 그것의 사용을 원치 않는다는 모습은 편견의 한 예일 것입니다. 편견 가운데서도 심한 편견일 것입니다. 심함을 넘어 잘못된 편견으로 이는 조절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얘기가 좀 돌았는데, 앞서의 확률은 인생에 항시 등장하고 사용하는 인간의 삶의 중요한 방편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확률은 매우 중요한 삶에 함께하는 접근법입니다. 다만 그 용어를 생각하는가 습관적으로 행동화된 것인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근래 생각해보는 어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곳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재미적 접근이기도 하며 학문의 주요 질문이기도 한 문제가 있어 소개하며 얘기를 다루어 봅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 보상 내지는 피해야 할 부분에 관해 종종 등장하는 정답이 이미 있다는 접근에 대해, 의문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로 함께 가늠해 보며 유익을 얻기를 바래 봅니다. 존재 가능한 편견이 될 수 있음과도 연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에 관해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택에 있어 사용하는 용어로 분수가 있으며 확률과 유사한 모습입니다. 1/2, 1/3, 1/4, 2/5, 3/9… 이는 선택 가능한 것 가운데 발생 가능한 것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 내는 것입니다.
예로 오늘 집에 가는데 몇 시에 들어갈 확률과 같이, 평시에 거의 비슷하게 들어가는 시간이 있고 예외적으로 같은 시간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는 것과 같이, 한 학생이 해당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한 사람이 어느 방향을 선택해 나갈 것인가 아닌가 와 같이. 인간은 피조물로서 다양한 존재 가치와 능력을 보유함으로 너무 일방적이고 좁은 선택의 폭을 둠은 부적절하다 할 수 있음에도 때로는 이런 확률 선택을 통해 가늠해 보게 됩니다.
선택을 이루는 배경에 존재하는 변수가 몇 개인가에 따라 그 결과를 추정해 보는 것이 쉽기도 어렵기도 가능하기도 불가능하기도 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런 부분에 재미가 있다면 관련 분야가 적성에 맞을 것 같습니다.
얘기가 길었습니다. 아래의 종종 등장하는 예시를 통해 한번 가늠해 봅니다.
선택 가능한 가운데 한곳을 맞추는 것입니다. 1/3을 선택하는 순간 택하지 않은 2/3과 대비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군데에 보물이 있다는 1/3의 선택 문제로, 어느 문을 선택하던지 선택한 1/3과 나머지 2/3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한곳을 알려준 이후에 사람들은 1/2과 1/2의 선택으로 알기도 한다며, 옳은 접근은 1/3과 2/3의 선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2/3를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A를 선택한 경우 1/3에, B와 C가 2/3이되며, C가 없음을 알게되니 B가 2/3가 되어 당첨 가능성이 높아져 B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도 1/2라고 여겼는데 틀렸구나 하며 생각을 고치고 답을 받아들이고 지나갔을 수 있으며 실제 과거에 적지 않게 지나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음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물론 사견으로 각자의 견해는 자유입니다. 물론 자유여도 좀 더 답에 가까워지려는 모습을 유지했으면 합니다.
여러 삶의 체험으로부터 얻는 개인의 쌓아가는 견해는 개인의 결정의 바탕이 됩니다.
내가 그간 알던 모습을 토대로 오늘의 무슨 모습을 바라보게 됨은 당연하기도 합니다. 이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과거에 근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오랜 시절 지각을 습관처럼 해온 사람이 있는데, 오늘 그 사람이 지각을 했다면 좋지 않은 비난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편견이라기 보다는 정상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사람이 지각한 이유는 길에서 꼭 필요한 누군가를 도와 주는 일에 사용해 늦었다 라든가, 몸이 아파서, 집에 응급한 일이 있음의 사실이 밝혀진다면 이는 다른 얘기가 됩니다. 물론 지각한 사람을 비난하는 그 사람을 잘못이라고 하는 모습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선행 내지는 곤란을 체험한 그에게 이렇게 하대할 수 있는가 분노가 일수 있음에도 이를 넘어 좀 더 물러서 당시를 볼 필요가 있음은 어느 일방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난하는 사람 또한 자세한 이유를 몰랐고 이를 넘어 그 사람은 그간 지각을 적지 않게 반복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좀 더 항시 너그러움을 지녔다면 좋았을 것이며 당시 도를 넘어 비난을 행하였다면 그 부분에 관해서는 잘못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 가운데 모르고 비난한 사람을 잘못이라고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이후에는 정상 참작하여 서로 간에 이해를 달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제삼자가 이런 모습을 목도하고 판단을 내림도 같은 선상입니다. 누군가를 돕고 늦은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비난할 수 있는가 라고 볼 수 있음과 이는 그 제삼자에 관한 편견으로 이어집니다. 그 비난 하는 자는 집에서 좋지 않거나 출근 와중에 그런 경험을 겪었을 가능성과 이에 기존의 판단을 더하여 비난을 했을 수 있기에 서로 간에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가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반적 의견과 편견의 성립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또 늦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지 편견이 되는 것인지의 그 차이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출근시간의 변경, 적절한 자리 등 개선을 향한 적절한 소통이 필요하며 중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동전을 100번 던졌는데 이미 99번 앞면이 나왔다면 다음 번에는 뒤가 나올 것 같음에도 여전히 앞뒤 반반인 1/2이 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그만큼 나왔다면 동전에 조작을 했거나 잘못 만들어진 동전이라는 주장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타당합니다.
관계 가운데 이런 정상과 비정상과 일반과 오해에 대하여 좀 더 가늠해 보는 모습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장과 성숙은 어느 정도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있음에도 대개 성장에는 잘잘못이 포함될 여지가 있음에 비하여 성숙은 좀 더 진정한 성장에 관한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
과학적 접근이 대체로 어느 한 단편을 넘어 오랜 축적된 자료에 근간하여 그 진정한 이유를 판단해 내려는 부분이 있음이, 그렇지 않은 여느 모습에 비해 정당하다고 평가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학적 접근을 통해 언급한 해당의 선택 문제는 과연 어느 쪽이 좀 더 답에 가까운 것 일까요.
진정 1/3, 2/3의 문제일까요, 1/2, 1/2의 문제일까요.
개인적으로는 그 한 문제가 몇 분, 몇 십분 소모되며 관심을 끄는 가운데, 진행자가 처음 문을 열어 보여준 것과 그 다음은 연속성의 문제와 각각 독립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연속성으로 접근한다면 A 1/3, B와 C를 묶어 2/3의 선택 문제로 인식하여, C의 가능성이 줄었으니 할 수 있는 한 2/3가 된 B를 선택해야 한다는 답이 적절합니다.
앞뒤는 연결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는, 이전과는 독립적인 문제로 C가 알려진 이후에는 1/2, 1/2 의 선택 문제로 여겨 어느 쪽을 선택하던지 이는 특별히 더 나은 힌트를 제공함이 없다고 여기며 둘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입장 모두 유효하다고 여깁니다.
1/3, 2/3로 여겨야 한다면, 2/3, 1/3으로도 여길 수 있지 않나요. 진행자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한쪽을 열었던지 빈 곳을 알려주었다면, 애초에 선택한 부분을 1/3이 아닌 2/3의 부분을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적절하며, 기존의 선택하지 않은 부분이 2/3라는 주장도 적절하다고 여깁니다.
나아가 진행자가 참가자에게 정답을 맞힐 수 있게 하기 위함인지, 그 반대인지 모두 가능하기에 이 변수는 가치가 좀 낮다고 여깁니다.
급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다르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삶에는 이런 부분들이 있기에 이미 알려져 있고 알고 있다고 자신함을 때로는 조심하며 의문해 보고, 나은 선택을 이루려는 접근으로서 인류는 이만큼의 성취를 이루고 있으며 향후에도 그와 같음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여겨봅니다.
성경의 말씀은 어떠한가요.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고 여기면서 때로는 진리와 좀 떨어진 것인데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자체로 진리로 주장하려는 모습은 혹시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런 모습에 대한 예화가 성경에는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 이전부터 이천 년 전 즈음에 걸쳐 주신 성경의 말씀을 통해, 유용하게 잘 이해 접목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넘어 이 세대에 여전히 유효하게 읽어 가고 있는가를 살필 여지를 주심은 계속 성경의 존재가치를 더한다고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성경에 기록된 비 진리 부분의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맞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진리는 생명력이 있음이 그와 같음을 가늠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이며 저것은 무엇이다 라는 접근과 이해 등의 인류의 노력은 결국 끝이 없을 것임을 가늠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무언가를 인생이 온전히 알 수 없으며 슈퍼컴에 이은 양자컴과 그 이후의 무엇에도 발견하는 것에는 더 나은 것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책을 지음이 끝이 없다고 하심으로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잠언 12:12) “ 알맞게 행할 것을 권면함과 같이, 과거와 오늘과 앞날이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함과 과거와 오늘과 앞날의 근간이 다름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주어진 오늘과 달란트를 잘 사용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복이 있다고 가늠하심을 새삼 묵상해 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실천 여부는 다를 수 있음을 압니다. 몰라서 못한다기 보다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게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모습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도래할 미래의 어느 시점에만 있음을 넘어서, “ …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 하심의 말씀을 통해 이해함도 적절함을 일깨웁니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간략하게 그 핵심 내용만 언급하고 결과를 전하면 되지 그것을 전하려 이렇게 장황하게 얘기할 이유가 있나요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모습이 적지 않습니다. 스스로도 가늠해 보면 알 것 입니다. 그런 주장도 틀리지 않고 이쪽도 틀리지 않는다 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인생에 대해 태어나고 성장하여 죽는다 라고 간략하게 얘기하면 되는데 무엇이 그렇게 할 얘기가 많은가 라고 주장에도 그 말도 맞고, 인생에 대해 끝없는 얘기를 풀어내는 모습도 맞습니다.
자유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도 저렇게 보는 것도.
진행자가 답이 A라는 것을 알고 C를 열었던지, 답이 B라는 것을 알고 C를 열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이 확률은 생각하기 나름이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각각 독립적인 문제가 되어 처음에는 1/3이 되나 두 번째는 1/2이 된다는 주장을 틀리다 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해당 문제는 열매의 딱딱한 부분에 포함된 일부 먹을 수 있는 부분을, 그러나 먹기에는 곤란한 부분을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 하는가 음식물 쓰레기로 분리 해야 하는가와 같은 애매한 부분을 넘어서는 좀 더 무게 있는 논란이 있음을 가늠해 봅니다.
단답을 해야 한다면 어느 한 쪽이어야 할 수 있음에도, 정답을 찾아야 한다면 모두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판단을 중지하라는 심리 상담 등의 분야의 중요한 접근법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한 개인을 볼 때 그 과거에 어떤 인물이고 조금 전까지 어떤 일을 무슨 일을 행했는가를 넘어, 새 도화지를 대면하듯 하라는 방법론으로 여겨집니다. 쉽지 않습니다.
자신은 일평생 대쪽같이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는데 여느 불의를 감싸야 한다면 억울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를 보진 마세요.
용서받아본 사람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 죽이려 하는 군중에 함께 계실 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심에 결국 당시 남녀노소 모두 물러갑니다.
“ …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진정한 판단중지는 참된 사랑으로 가능한 것 같습니다.
물론 상처받은 직계 가족은 어떻게 하는가 라는 의문이 따를 수 있습니다. …..
세속적인 논제를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풀어내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여길 수 있음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모습도 저 모습도 틀리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판단 중지의 근저에는 좀 더 나은 관계 개선을 향한 모습이 있다고 보입니다.
이상의 내용에는 심리학 서적 지식이 포함됨을 알려드립니다.
2023년을 함께 하는 와중에 금맥을 찾는 문제를 한번 같이 풀어보는 것은 어떠한가요. Prize $ ?
글을 맺으며 아이디어 모자를 제안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Feb 2023